오랜만이죠.
벌써 올해도 막바지에 이르렀네요.
이맘때쯤이면 저는 꼭 어김없이 마음 한편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듯
몹시 흔들립니다.
여러분도 그러신다고요?
아마도 잘 살아왔는가에 대한 자기검열에 엄격해지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특히 저 같은 경우,
흔히 말하는 여성 갱년기를 거처야 하는 인생의 고갯길에 접어든 탓에
그 심란함이 유독 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위로가 받고 싶어졌습니다.
같은 시대를 함께 통과하고 있는 여자들에게서요.
마침 제가 몸담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올해 마지막 발제의 순서가 저 더군요.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그녀에게"
제목에서부터 왠지
나를 특정하여 누군가가 보내온 편지가 아닐까 하는 설렘은 물론
두 손을 맞잡은 표지의 두 여자에게서는 안정감마저 느껴집니다.
시인의 프롤로그를 읽습니다.
자신 속에 깃들어 살아온 수많은 여자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지어먹이고 싶은 마음으로 엮는답니다.
60여 편의 시를 다시 묶으며
시인은 중국에 전해오는 여자들만의 비밀문자인 '누슈'를 소개합니다.
비록 지금은 사라진 문자가 되었지만,
지금의 여자들에게는 '누슈'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비록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넘어선 언어 같은 것 말이지요.
저도 동감합니다.
여자들만이 오고 가는 그 내밀한 감정.
참고로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닙니다. 저는 그저 휴머니스트를 지향하는 여자로
이 세상 모든 인간 군상들이 평등하고 자유롭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요.
그렇다고 여기 이 시들이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씌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저는 단연코,
읽으면서 전혀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이면 깊숙이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고자 한다면 페미니즘적인 관점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따지지 않는다면,
이 시들은 그저 생활 밀착형 시들로
지극히 이념적이지도 관념적이지도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언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게다가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화가들의 그림이 시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감상의 묘미를 더하고 있지요.
자, 그럼 여기서 제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시 한편 소개해 볼까요?
다시, 십 년 후의 나에게
- 나희덕
십 년 후의 나에게,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그보다 조금 일찍 내게 닿았다.
책갈피 같은 나날 속에서 떠올라
오늘이라는 해변에 다다른 유리병 편지
오래도록 잊고 있었지만
줄곧 이곳을 향해 온 편지
다행히도 유리병은 깨어지지 않았고
그 속엔 스물다섯의 내가 밀봉되어 있었다
스물다섯 살의 여자가
서른다섯 살의 여자에게 건네는 말
그때의 나는 첫아이를 가진 두려움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한 마리 짐승이 된 것 같아요,라고
또 하나의 목숨을 제 몸에 기를 때만이
비로소 짐승이 될 수 있는 여자들의 행복과 불행,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 자란 만큼 내 속의 여자들도 자라나
나는 오늘 또 한 통의 긴 편지를 쓴다
다시, 십 년 후의 나에게
내 몸에 깃들여 사는 소녀와 처녀와 아줌마와 노파에게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그 늑대여인들에게
두려움이라는 말 대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책갈피 같은 나날 속으로,
다시 심연 속으로 던져지는 유리병 편지
누구에게 가닿을지 알 수 없지만
줄곧 어딘가를 향해 있는 이 길고 긴 편지
나희덕 시선집 『 그녀에게』
소녀와 처녀와 아줌마와 노파.
맞아요. 제 안에는 소녀도 살고 처녀도 살고 아줌마도 살고, 때로는 노파도 찾아와 저를 긴장하게 만들지요.
왜 그렇게도 생물학적 나이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한결같이 그들은 저를 응원했을텐데 오히려 제가 면박주고 외면해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그러지 않으렵니다.
영원한 내편인 그들과 함께 주눅들지 않고 씩씩하게 나아가볼래요.
이 시는 그러한 의미에서 저에게 힘이 되는 시였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후의 나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까...생각하게 만들었구요.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으신가요?
올해가 가기 전 숙제로 남겨야겠습니다.